삼수사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은 울화가 치밀 정도로 화가 날 일이다. 그러나 홍종학 교수의 명제는 서울대에 가야한다기 보다는 공부를 잘 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라는 것이 곧 교육을 잘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홍교수는 공부를 '기율(discipline)'이라고 정의한다. 기율은 쉽게 말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절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어 영어 수학은 그러한 기율을 익히는 기초단계라고 한다. 인생에서 왜 이런 기율이 필요한가? 그것은 곧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홍교수는 주장한다. 정말 얼마나 옳은 말인가? 자유교육의 이상이 곧 그것 아닌가? 그럼에도 홍교수는 매우 상식적 수준에서 알기 쉽게 '자유'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첫째 공부를 잘하면 당장의 귀찮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둘째 공부를 잘하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셋째 공부를 잘하는 것은 사회에서 강해짐을 의미하고, 강하다는 것은 보다 많은 자유를 의미한다. 넷째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강해야 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도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한다. 다섯째 행복의 궁극적인 형태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그 첩경은 공부라고 한다.
서태지, 빌 게이츠, 조훈현, 이창호, 박세리는 모두 공부를 잘 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배웠다. 그것이 공부라는 것이다. 물론 학교 공부도 잘 했다. 그러면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영어 수학이 이들과 무슨 관계인가. 교육학자들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수천년간 내려온 인류의 유산으로서 교육내용을 그렇게 정했는데 홍교수는 책에서 그것들을 '언어를 배우는 일'로 정의하고 있다. 국어는 한국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필요하고, 영어는 외국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필요하며 수학은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과학이론을 이해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사람과 그리고 사물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고등학교까지 배우는 보통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러한 언어소통능력을 배우는 것이며, 대학에 들어가면 이러한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과학을 배운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의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홍 교수는 이러한 공부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안 할 뿐이거나 잘못하고 있을 뿐이란다. 마치 모든 사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다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의 학교에서는 그 숱한 비극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나는 그 이유를 간단히 두 가지로 말하고 싶다. 그 하나는 우리가 무서운 거짓말로 우리의 아이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며, 그 둘은 우리의 아이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공부는 어려운 것이어서 실패자와 성공자는 있기 마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고 더 끔직한 일은 인생에서 실패자와 성공자를 구분하는 이유로 이용하고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어 영어 수학을 필요한 만큼 배운다면 그런 것들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어렵게, 사실은 너무 엉터리로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는 수 많은 실패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댓글